Breaking
라이프핵 : 이슈(EASY Story)
여리지만 강한 박애주의자 '오드리 헵번'의 일생
2019-05-27 11:46:30
이지나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인기 배우로 자리매김했다(사진=ⓒ플리커)

[이지 라이프 투데이=이지나 기자] 영화 '로마의 휴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할리우드의 배우 오드리 헵번. 헵번은 특유의 우아하고 귀품있는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배우의 삶 이후에는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하며 진정한 박애주의를 실천했다. 헵번의 일생을 조명해보자.

오드리 헵번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은행가인 아버지 J.A. 헵번-러스턴과 여남작이었던 어머니 엘라 반 힘스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 대부분을 영국에 위치한 기숙학교에서 보냈다.

그러나 이후 영국과 폴란드 동맹으로 인해 독일과의 전쟁이 촉발되자 어머니는 헵번을 친척이 사는 네덜란드로 데리고 간다. 그곳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2차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에 독일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네덜란드도 침공을 당했다. 어머니와 헵번은 전쟁 치하에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고한다. 실제로 밀가루를 제외하고는 너무 먹을 것이 없었으며, 튤립 구근을 먹고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헵번은 당시 발레 댄서로 활동했는데,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몇몇 쇼에서도 공연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단역에서 스타로

길고 길었던 전쟁이 끝나자, 헵번은 영국으로 돌아와 발레를 이어갔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영국 런던에서 발레를 전공한 후에는 여러 뮤지컬 무대에 단역으로 서며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당시 헵번이 공연한 작품으로는 1949년작인 '하이 버튼 슈즈(High Button Shoes)'을 비롯한 '소스 타르타르(Sauce Tartare)', 그리고 이듬해에는 '소스 피컨트(Sauce Piquante)'가 있다. 그러나 정식 데뷔작은 1951년 무보수로 출연한 '원 와일드 오트(One Wild Oat)'다. 같은 해 영화인 '영 와이브즈 테일즈(Young Wives' Tales)'와 '라벤더 힐 몹(The Lavender Hill Mob)'에도 출연했다.

당시 그의 연기는 프랑스의 소설가였던 콜레트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에 콜레트의 작품인 '지지(Gigi)'의 주인공역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며 열연했다. 헵번은 당시 연극에서 친척으로부터 고급 매춘부로 설득당하는 소녀의 역할을 맡았는데, 비평가들에게서 좋은 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 영화 '로마의 휴일'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게다가 이 영화로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이후엔 뮤지컬과 영화를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지속했다. 몇 년 후 결혼하며 부부가 된 당시 배우 멜 페러와 뮤지컬 '온딘(Ondine)'에 출연했을 때는 많은 뮤지컬 팬에게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후 토니 어워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54년에는 영화 '사브리나'에 출연해 부유한 가족의 딸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에서 그는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며 많은 부잣집 아들로부터 관심을 얻는 상류사회의 인물을 연기했다. 이 작품 역시 아카데미 후보로 오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57년에는 다시 뮤지컬로 돌아가 '퍼니 페이스(Funny Face)'에 출연, 엄청난 발레 실력을 선보였다. 당시 작품에서 헵번이 입은 옷은 현재까지도 최고 패션 디자이너로 인정받는 위베르 드 지방시가 제작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은 이후에도 많은 영화와 뮤지컬 출연으로 이어졌다. 각종 어워드에서 더 많이 후보로 지명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에 함께 출연하는 상대 배우들도 매우 명성 높은 이들이었는데, 대표적으로 숀 코너리를 비롯해 렉스 해리슨, 캐리 그랜트, 프레드 아스테어 등이다. 헵번이 그렇다고 가벼운 영화에만 출연한 것은 아니다. 1959년작 '파계(The Nun's Story)'에서 맡은 수녀 역할 역시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인정받았다. 이후 1961년 출연한 트루먼 카포트 원작의 '티파니에서의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로 다시 한번 대성공을 거둔다.

▲헵번은 젊어서는 영화 및 뮤지컬 커리어로, 노년기에는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며 바쁜 삶을 보냈다(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결혼과 이혼

헵번의 첫 남편은 멜 페러로, 온딘에서 같이 출연한 것을 계기로 사랑을 싹틔우다 1954년 9월 25일 스위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6년후 아들 션이 태어났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 생활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1967년 둘은 이혼 소송을 제기하며 각자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다. 

2년 후에는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와 결혼해 1970년 아들 루카를 얻는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금방 끝을 맺었다.

박애주의자로서의 삶

헵번이 수십 년간 보여준 영화와 뮤지컬에서의 연기는 많은 관객들과 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정작 헵번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이에 1980년대부터는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하며 기근과 전쟁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지원하는 또 다른 삶을 맞이했다. 그는 실제로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는 동안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아프리카를 비롯한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 전 세계의 많은 곳을 여행하며 삶을 보냈다. 

그러나 이후 대장암으로 인해 모든 활동을 접고 치료에만 전념해야 했다. 평생의 연기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배우 조합상에서 특별상에 선정되기도 했는데, 시상식에는 서지 못하고 대신 후배 배우인 줄리아 로버츠가 대리수상했다. 그리고 1993년 1월 20일 스위스의 톨로시나에서 조용히 마지막 삶을 마감했다.

[이지 라이프 투데이=이지나 기자]